Archive for November 7th, 2010

November 7, 2010: 11:22 pm: bluemosesErudition

“헌신이 전제되지 않은 헌금은 복채다.”

: 11:19 pm: bluemosesErudition

1. “음란한 마음과 교만한 얼굴”(호세아 5:1~7)에게,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사무엘상 2:30)

2. 날마다 임종의식을 쇄신하며 믿음을 구현하는 신앙의 야성은 하나님을 가운데 모신 부부의 견고한 연합 속에서 그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다.

: 9:18 pm: bluemosesErudition

How One Man and Ten Symphonies Changed Our World (1860~1911)

: 8:37 pm: bluemosesErudition

1. “흡혈박쥐의 일생은 힘겹다. 온혈동물이지만 깃털이나 털이 없기에 몸의 열을 많이 잃는다. 따라서 에너지가 아주 많이 필요하다. 흡혈박쥐는 끼니마다 자기 몸무게의 50~100%에 이르는 먹이를 소비한다. 하지만 흡혈박쥐 가운데, 많으면 3분의 1이 밤에 끼니를 얻지 못할 수 있다. 한 끼라도 거르면 위험하다. 흡혈박쥐는 먹이를 먹지 못하면 60시간 후에 죽는다. 왜냐하면 그 무렵이면 체중이 25% 줄어들어 임계체온을 더는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흡혈박쥐는 먹이를 나누는 정교한 협동체제를 발달시켰다. 먹이 나누기는 어미와 새끼 사이뿐 아니라 어른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 서로 돕기가 중요하다. 서로 돕지 않는다면, 흡혈박쥐의 연간 사망률은 연이어 이틀 밤 끼니를 거를 확률을 바탕으로 계산해보면 약 80%에 이를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망률은 약 25% 정도인데, 그 까닭은 먹이 나누기 덕분에 위험한 밤이 찾아와도 무사히 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_ Joan Roughgarden(2005[2010]). 노태복(역). <진화의 무지개(Evolution’s Rainbow: Diversity, Gender, and Sexuality in Nature and People)>. 뿌리와 이파리.

2. 스티븐 제이 굴드는 <풀하우스>에서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임을 역설한다. “그의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진화는 진보가 아니다. 둘째, 진화는 사다리 오르기가 아니라 가지가 갈라지는 과정이다. 셋째, 진화에서 우연의 역할은 중요하다.”(이명희)

3. P. A. 크로포트킨 역시 주장하듯 진화의 주 요인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상호부조’이다. “크로포트킨은 작은 곤충에서 조류, 수많은 동물들의 개별적인 사례들을 천착하면서 결국 상호부조야 말로 가장 번성하고 발전된 종들에게는 일종의 철칙처럼 나타나고 있으며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로 작용한다는 점을 증명하려 했다. 약하고 작은 개체들도 무리를 짓고 사회를 구성해서 서로 작은 힘을 연대하게 되면 막강한 외부의 적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종보다 더 오래 살며 혹독한 자연 환경에도 효율적으로 대처해서 종들이 번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에게 편견의 대상이었던 원시인이나, 야만인, 미개인들도 실상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잔인하게 이웃을 해치는 현상만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 협동하고 연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역사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무제한적으로 내몰리는 경쟁의 역사가 아니라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구성원들을 최대한 보호하고 공존하게 하는 지혜로운 장치들을 끊임없이 만들어 온 역사라고 크로포트킨은 체계적으로 증명하고 있다.”(김영범)

: 8:35 pm: bluemosesErudition

0. “젠더 변이와 동성애는 동물한테는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인간에게도 전적으로 좋은 현상이다. 내가 보기에 비도덕적인 것은 성전환 혐오와 동성애 혐오다. 극단적인 경우, 이 공포증은 고소공포증이나 뱀공포증과 마찬가지로 치료가 필요한 질병일 수 있다(Joan Roughgarden, 2005[2010]).”

1. “생물학적 요인은 진정한 성의 형성에 필요한 기여 요인이지만 충분한 기여 요인은 아니다.” “사회문화적 요인은 진정한 성의 형성에 충분한 기여 요인이지만 필요한 기여 요인은 아니다.”(43)2. “성적 매력은 보통 연속체적으로 설명되는데, 한 쪽 끝은 이성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경우이고 중앙에는 양성 모두에게 그리고 다른 쪽 끝은 오로지 동성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경우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조합이 존재한다.”(89)

3. “게이 교회의 설립자 중 많은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높이 인정하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게이 권리’를 옹호하는 몇몇 자유주의 교단보다 신학적으로는 오히려 더 보수적이다. 게이 교회와 여타 복음주의 교회 간의 큰 차이점은 동성애 행위의 장려 및 변호와 관련된 성경 해석의 문제다. … 게이 교회는 동성애 행위는 묵인하면서,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커플 모두에게 헌신된 배타적 관계를 표준으로 적극 제시한다. 그들은 우발적인 성관계나 난잡한 성행위는 하나님의 목적에 어긋난다고 믿는다. 게이 교회는 에이즈 환자에 대해 동정과 사랑으로 대할 것을 가르치는 반면, 에이즈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성을 난잡하게 오용한 비극적 결과라고 지적하는 면에서는 보수적 그리스도인과 맥을 같이 한다.”(115~116)

4. “나는 내가 여인의 품보다도 게이 남자의 품에서 편안함을 더 많이 느끼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그것은 섹스 행위가 아니다. 그건 사랑의 행위다. 그것은 성적 만족감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영적 생존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가 수십 년이나 애쓴 끝에 발견한 것은 아무도 자기의 성적 지향을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이다. 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단언하건대, 만일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결혼 관계와 가족 그리고 그의 독특한 사역을 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멜의 가치관은, 내가 아는 대다수의 게이와 레즈비언의 경우처럼 나와 나의 이성애자 친구들의 가치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랑, 존경, 헌신, 양육, 책임성, 정직, 성실 등이다.”(116)

5. “동성애 공동체는 동성애 행위를 격려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제공한다. 다른 한편, 동성애적 지향을 가진 사람 중에 금욕이나 변화의 길을 택한 이들은 자기를 격려해 주고 후원하고 힘을 실어 주는 기독교적 공동체를 찾아나설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동성애자가 자신의 지향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는 하나님 앞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Balswick & Balswick, 1999[2002]: 122)

: 8:20 pm: bluemosesErudition

“그람시는 옥중서신에서 검열을 피해서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철학’이라 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실천적 지혜는 보편적인 것에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까지도 알아야만 하는 것”이라면, 그가 마키아벨리를 읽은 까닭도 짐작이 간다.”(gaudium)

: 5:37 am: bluemosesErudition

1. 지역균형 혹은 사회배려를 가리켜 역차별이라 하는 원성이 크다. 기회와 과정이 아닌 결과의 입장에서만 사태를 판단한다면 그럴 수 있다. 각개약진의 시대에서, 지역균형과 사회배려는 요청되고, 또 거부된다.

2. 타인의 표현을 수용하는 귀(Ear)는 인간의 신체 중에서 표현력이 가장 빈약하다. ‘싸나이’들은 학교생활에 순응하는 학생들을 ‘귓구멍(Ear-hole)’이나 ‘귓볼(Lobes)’이라며 조롱했다.

3. 자기배제를 적극적으로 선택했다는 말은 싸나이 자신들 나름으로 학교사회를 간파하고 대항하였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저항이 가담이 되는 “노동자 되기”(Learning to Labour)의 자발적 복종은 주체가 되고자 하였으나 객체로 전락하는 ‘수술 중 각성’의 일면을 제시한다.

4. “만들어진 인재”이길 거부하면 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세태에서 어떻게 인생의 최종근거를 회복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다.

*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윌리스(Paul Willis, 1945~)가 조사했던 그런 학교가 영국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아들의 문화가 영국 학생 문화의 전형적인 모습은 아니다.”(238) 다케우치 요우의 이같은 논평은 <학교와 계급재생산>의 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실토에 가깝다.

: 5:01 am: bluemosesErudition

1. “‘정치’란 한 정치적 조직체 내에서의 권력배분 또는 여러 정치적 조직체들간의 권력배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를 하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Weber, 1919[2007]: 35)

2. “한 특정한 영토 내에서 - 이 점, 즉 ‘영토’는 현대국가의 특성 중 하나입니다 -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성공적으로)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공동체는 곧 국가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22)

3.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이라는 이 특수한 수단과 손을 잡는 자는 - 그리고 모든 정치가들이 그렇게 합니다 - 누구든 이 수단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들에 직면하게 됩니다.”(131) “그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135)

* ‘정당한 물리적 폭력에 근간하여 권력을 배분하는 것’이 정치라 한다면 니코스 풀란차스, 데이비드 이스턴 등의 규정도 베버에 기인한다.

: 4:57 am: bluemosesErudition

17세기 잉글랜드, 18세기 프랑스, 19세기 프로이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크와 몽테스키외 그리고 베버의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 3:58 am: bluemosesErudition

1. “‘까꿍’이라는 기묘한 제명의 논문(’Peekaboo’ in E. Margolies, ed. The Hidden Curriculum in Higher Education, 2001)에서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소설 <도난당한 편지>를 제재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마고리스는 ‘훤히 볼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인식되지 못함을 두고 감춰진 커리큘럼의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2. 숨겨진 커리큘럼은 가치의 제도화를 통해 편성되어 [마치 ‘스펙’을 취득하면 그 ‘역량’을 갖추었다고 간주되는] 학교화된 사회 혹은 사회의 학교화를 조장한다. 학교중독증의 탈피, 이것이 바로 일리치가 역설하는 “Deschooling Society”의 요지이다.

3. 입학사정관제 관련하여 ‘만들어진 인재’(HRM)에 대한 비난이 적지 않은데, 기실 교과부의 혈안은 ‘인재 만들기’(HRD) 아닌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교육은 “만들기”(making)인가? 둘째, “인재”(Talent)는 누구인가?

4. 만들기는 주체가 원하는 대상을 산출하는 것으로서 ‘인적자원의 역량 강화’로 귀결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인재란 핵심역량이라 명명된 요소들의 기계적 측정치인 스펙을 보유한 인적자원을 지칭한다.

5. “취업을 앞둔 사람들은 취업에 성공하기 위해 이른바 ‘스펙’, 즉 취업자격요건을 준비합니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격과 특성을 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산과정에서 기계에 자신을 맞출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취직하고 싶은 회사의 이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끼어들어가 부품이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상품화되는 과정입니다.”

6. “자기조정 시장에서는 노동력도 상품이 되었으니 마땅히 필요할 때마다 척척 인간이 만들어져서 필요한 곳에 노동력을 공급해야 할 텐데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남녀 한 쌍을 돼지 키우듯이 어느 한 곳에 가두어두고 정기적으로 관계를 맺게 하면 아이를 많이 생산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에게는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에 대한 자기반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7.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문학은 시장에서 경쟁이 안 되니까 설 자리를 잃었다. 그러므로 인문학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늘려야 한다. 학자들이 편하게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가만히 따져보면 돈이 없어서 위기가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원인은 시장경제이고 처방은 국가지원이라는 것입니다. 위기에 대한 해법 자체를 돈에서 찾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참으로 인문학적 태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처방입니다. 그들은 속된 말로 밥그릇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지, 사회가 지향하는 바 혹은 흐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지 못합니다. 인문학은 바로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제기에서 성립하는 학문입니다.”

8. “우리의 삶의 최종근거는 무엇입니까? … 공자의 최종근거는 인(仁)입니다. <논어> 안연(顔淵) 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안연이 ‘인’을 묻자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대답합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이기고 우주의 질서를 구현한 예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禮)”는 하늘의 이치에 맞닿아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말은 “복(復)”입니다. 본래 우리가 가지고 있었으나 어지러운 세상이 되어 사라진 예, 즉 ‘천리를 인간사회에 구현한 질서’를 회복하자는 것입니다.”(강유원, 2010: 513, 517, 522~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