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January, 2017

January 27, 2017: 10:53 am: bluemosesErudition

마치 쉬운 수능문제를 풀고 또 풀어 만점에 가닿듯 저들의 문제의식은 2013년을 벗어나지 못한 채 더 정돈된 입장만 피력하고 있다. 물론 그 자체로 대견하나 답보에 머물러 궁극적으로 퇴화하고 있어 애석하다. 분명 개별 역량은 엇비슷한데, 왜일까. 당면 과제를 해결하며 고군분투하나 향후 의제를 간파할 여건과 여력 모두 결여되었기 때문인가. 결국 ‘한정된 사례’라는 굴레인가. 넓게 파지 못하여 깊게 파지 못하는 한계에 봉착한 것인가.

: 1:37 am: bluemosesErudition

1540년부터 1810년까지 270년간 에스파냐는 칠레를 점령했다.

: 1:35 am: bluemosesErudition

더 깊고 더 넓은 안목으로 몽매한 저들을 의식화 하겠다고? ‘안내’는 강연도 강의도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날 선 비방에 맞대응하면 안 된다. 헤아려 공감대를 조성해 공동의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나는 올해 초 대구에서 이것을 배웠다.

January 26, 2017: 9:46 pm: bluemosesErudition

“대개의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놓치는 세계의 구멍들을 논리 이전에 직감으로 먼저 알아차리고 예민하게 반응할 수 없다면, 굳이 예술을 할 이유가 있는가.” 쇼맨십에 물든 어떤 자의 한계로 읽을 수도.

: 8:34 pm: bluemosesErudition

이창동의 “박하사탕”과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1999년 개봉하였다. 이후 십 수 년간 저 아포리즘의 상반된 인용 사이에서 자문하며, 나는 그때마다 레온 트로츠키의 유서를 기억하였다.

“의식을 깨친 이래 43년의 생애를 나는 혁명가로 살아왔다. 특히 그 중 42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의 기치 아래 투쟁해 왔다.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결국 나는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다.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방금 전 나타샤가 마당을 질러와 창문을 활짝 열어주었기에, 공기가 훨씬 자유롭게 내 방안을 들어오게 됐다. 벽 아래로 빛나는 연초록 잔디밭과 벽 위로는 투명하게 푸른 하늘, 그리고 모든 것을 비추는 햇살이 보인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훗날의 세대들이 모든 악과 억압과 폭력에서 벗어나 삶을 마음껏 향유하게 하자!”

: 8:25 pm: bluemosesErudition

러시아 혁명 100주년

: 8:24 pm: bluemosesErudition

The Prophet Armed 1879-1921, The Prophet Unarmed 1921-1929, The Prophet Outcast 1929-1940

: 8:12 pm: bluemosesErudition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근대 사회에 계급이 존재한다거나 계급투쟁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 공적이 마땅히 나에게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기 오래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 간의 경제적 적대관계를 기술했습니다. 내가 새롭게 행한 일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계급의 존재가 생산의 특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 2)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 3) 이 독재 자체는 계급의 폐지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통로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었습니다.”(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

: 7:34 pm: bluemosesErudition

“삼성그룹의 생존 여부와 한국 경제의 장래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특정 개인에 의해 좌지우지될 정도라면, 다원주의에 입각한 시장경제는 작동될 수 없으며, 이런 경제권력의 집중은 정치적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마저 형해화한다.”(박상인)

: 7:32 pm: bluemosesErudition

도킨스는 옥스퍼드 신입생 면접에서 이런 대화를 했다. “학생의 조부모는 몇 명인가?” “네 명입니다.” “증조부모는?” “여덟 명입니다.” “고조부모는?” “열여섯 명이죠.” “그럼 2000년 전 예수 탄생 시점에는 학생 조상이 몇 명이었을 것 같은가?” 그런 기하급수적 계산으로는 당시 세계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되므로, 옥스퍼드 신입생은 인류가 머지않은 과거에 수많은 공통 조상을 갖고 있던 친척들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도킨스는 “이런 질문에 흥미를 갖고 덤비는 학생이라면 옥스퍼드에서 배울 자격이 있다”고 했다. _ 조선일보가 근래 이러한 논조의 기사를 줄기차게 생성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미래를 주조하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