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우연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짝수번째 영화들은 확실히 전부 걸작이다. 두번째 작품 ‘원더풀 라이프’가 그랬고, 네번째 작품 ‘아무도 모른다’가 그랬다. 그리고 여섯번째 작품인 ‘걸어도 걸어도’ 역시 그렇다. 좀더 놀라운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런 성취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원더풀 라이프’와 ‘아무도 모른다’와 ‘걸어도 걸어도’는 시나리오 작법에서 배우들의 연기법까지 서로 확연히 다르다. 데뷔작 ‘환상의 빛’으로부터 시작해 올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공기인형’에까지 이르는 동안, 그의 작품세계는 점점 깊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연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시작한 그는 ‘원더풀 라이프’나 ‘아무도 모른다’ 같은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듯 기록영화적 화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극영화에 끌어들여온 감독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시대극 ‘하나’에 이어 발표한 ‘걸어도 걸어도’에 이르러서는 그런 족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정교하게 축조된 구조물이다. 어떤 대사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다. 어떤 상징도 돌출되어 있지 않고, 어떤 디테일도 불필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는 덜 조여진 나사 하나 없다. 그러면서도 여유와 관조 혹은 유머까지 넉넉히 갖췄다. 배우들의 연기마저 정확하고 깊은 이 작품은, 그렇다. 살아서 영화를 보는 행복이 여기 있다.
료타(아베 히로시)는 10여 년 전 바다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죽은 형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아내(나츠가와 유이)와 함께 부모님 댁으로 간다. 료타의 누나인 지나미(유) 역시 남편과 함께 도착한다. 그곳에 머물던 1박2일 동안 료타는 의사로 은퇴한 아버지(하라다 요시오)와 평생 주부로 살아온 어머니(기키 기린)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뜻하지 않게 들여다 보게 된다.
‘걸어도 걸어도’는 진행에 따라 이야기의 고리를 어떤 방식과 어느 정도의 속도로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한 최상의 사례를 예시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러티브를 격렬하게 뒤흔드는 대신 조용히 마음의 골짜기를 판다. 이 영화의 대사는 거의 대부분 간접화법으로 에둘러 가지만, 어김없이 과녁에 적중한다. 인물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모든 대사들은 언제나 들리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한다.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의 아픈 구석을 매섭게 찌르는 상황들은 일본인들의 가장 무서운 화법이 어떤 것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는 이렇다 할 사건 일어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프레임 밖에 있다. 흔하디 흔한 플래시백 한번 쓰지 않지만, 오래 전에 이야기 밖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삶 전체를 덮는 진원(震源)이 되어 세월을 넘어도 쇠하지 않는 흔들림으로 끊임없이 반복 회귀한다. 어떤 사건은 영원한 여진으로 남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들의 핵심 테마를 ‘죽음과 기억’으로 요약해온 숱한 평문들은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 창작자로서 그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바라본 것은 ‘남겨진 사람들’이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도 남겨진 사람들은 견딘다.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서 혹은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면서, 견디고 또 견디다가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손톱을 세워 상대를 후벼 파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저 보통 사람이니까. 한 줌의 잔인함과 한 뼘의 비정함이라도 있어야 또 한 해를 보낼 수 있으니까. 그래야 마침내 견딜 수 있으니까.
부엌 식탁에 앉아 있던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면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마음 속 묵은 어둠을 아들에게 넌지시 비추는 모습을 담은 옆모습과 뒷모습 쇼트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벌을 받지는 않을 거야.” 삶의 피해자인 어머니가 그 장면에서 흔들리지 않는 어조와 시선으로 내밀한 이야기를 마치며 차갑게 확신하는 모습은 섬뜩하면서 아프다.
이 영화의 가족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허물기 어려운 벽을 끊임없이 재확인한다. 이들은 서로 말하지 않는 비밀을 하나씩 간직하고 있다. 부모는 오래 전 추억을 회상하면서 장남과 차남의 행적을 혼동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취미를 오인한다. 아들에 대한 자책감과 미안함, 형에 대한 열등감과 아버지에 대한 자괴감, 사위에 대한 불신과 며느리에 대한 기피가 뒤섞여 그 작은 밥상의 1박2일은 ‘가족이어도 (혹은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음’을 끊임없이 반추하게 한다. 가족이라는 가장 작고 단단한 집단 안에서 생겨나는 균열의 흔적을 예민하고도 탁월하게 드러내는 이 영화는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가 만들어낸 일본 가족영화의 가장 빛나는 유산을 이어받기에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다.
“늘 이렇게 한발씩 늦는다니까.” 어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끝내 떠올리지 못했던 스모 선수 이름을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야 생각해낸 아들은 가벼운 어투로 스스로를 잠시 책망한다. 세월이 흐른 뒤에 펼쳐지는 라스트 신에서 그는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자책한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는 훗날의 후회를 털어낼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영화는 쉬운 화합의 구두점을 끝내 찍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려.” 극중 어머니와 아버지가 즐기던 옛 노래 가사처럼, 걸어도 걸어도 끝내 길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인물들이 떠난 뒤의 빈 길과 마을, 그리고 바다까지를 담아내기 위해 서서히 부상하는 카메라를 밀어 올리는 것은 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자의 관조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길을 가야 하는 자의 안간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