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Alphonse Mucha에 의해 조성되어 15년 간 전성기를 구가했던 새로운 예술.
1895년 Alphonse Mucha에 의해 조성되어 15년 간 전성기를 구가했던 새로운 예술.
전쟁 비용(1338~1453, 영국-프랑스 백년 전쟁) 충당에서 비롯된 ’성직자 과세’ 갈등(1309~1376, 아비뇽 유수).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이 구별 없이 엉켜든 사태가 어떠했는지는 1323년의 사건이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프랑스 아비뇽에서 교황에 오른 요한 22세는 일찍이 프랑스 왕 필립을 도와 거짓 모함으로 성당기사단을 박해한 바있다. 그는 성당기사단을 파렴치한 범죄조직으로 매도하고 타락한 성직자들과 손을 잡아 재물을 가로챘던 것이다. 천재적인 재정 전략을 발휘하여 세속 군주들의 권력을 대체하고, 재정적 힘으로 세상에서의 권위를 내세우던 교황의 입장에서는 청빈사상을 내세우는 교파가 무척이나 껄끄러웠을 것이다. … 이미 요한 22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그에 대응하여 교황을 배교자로 비방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드비히와 이단으로 몰리고 있던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손을 잡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었고, 이들은 교황파에 대립하는 황제파를 형성하게 된다.”
1. “3세기의 위기는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붕괴와 쇠퇴 현상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내에서 25명의 황제가 난립했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 정치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Tetrachy(사두정치체제, 285~324)라고 한다.” “395년 테오도시우스는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은 이로서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분리 되었으며 다시는 통합되지 않았다.”
2. 410년, “알라리크(Alaric)가 거느린 고트족(Goth) -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기원한 동부 게르만족의 일파 - 의 침략으로 로마가 파괴되었다. 엄청난 재앙이었다.”
3. “프랑크 왕국의 베르됭(843), 메르센(870) 조약 이후 중세에서 근대 초까지 이어진 중앙유럽국가들의 정치연방체인 신성로마제국(962~1806[1808])의 해체를 선언한 프란츠 2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를 건립하였다.”
1. 지진 다발에 이어 유럽 재정 위기, 태국 내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미 멕시코만 기름유출, 중국 간쑤성 폭설(5. 17.) 등으로 급증하는 문명의 위기는 종교와 전쟁 이외의 다른 처방을 외면케 할지 모른다. 한반도의 천안함 사건이 도화선을 자처하지 않길 소망한다.
2. 국외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도 전쟁을 원하는 세력이 과반인 듯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소식에 광장을 빼곡 채운 군중들 틈에서 히틀러가 환호하고 있다. 목표 없는 생활을 연명하며 예술가와 영웅을 꿈꾸던 그가 자기 존재의 보잘 것 없음과 불확실한 상태에 대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명백히 드러났다. ‘그 당시 매 시간이 나에게 구원처럼 다가왔다.’ 그는 ‘벅찬 가슴으로 하늘에’ 감사했다고 한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온 것이다.”(Seligmann, 2004[2008]: 322~323)
“갑자기, 그리고 너무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마치 물 마른 강바닥에서 소용도 없는 아가미 꿈벅대는 물고기처럼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_ 지구화로 절멸한 원주민.
14세기 기후변화로 촉발된 중세의 가을이 유럽 전역에 걸쳐 르네상스로 연계되던 15세기 무렵 오스만 투르크 제국(1299~1922)이 비잔티움 제국을 점령하여 지중해의 과반을 장악하자 신항로 개척이 성황을 이루었다. 16세기 교황권의 쇠락은 재정악화를 야기하여 교회의 부패와 함께 종교개혁의 빌미를 마련하였는데, 그 여파로 절대왕정이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부르주아의 성장이 영국의 권리청원을 위시한 시민혁명을 초래하였고,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근대국가 체제가 도입되었다.
1. 柄谷行人(2001)은, Marx에게서 ‘자기가 있되 있되 자기가 없는’ 윤리적 지양을 목도하고, Kant에게서 ’자기가 있되 자기가 없는’ 경제적 지향을 발견한다. 신약으로 구약을 읽어내고 구약으로 신약을 읽어내듯, 그는 경제를 통해 윤리를 그리고 윤리를 통해 경제를 파악한다. 그 결과 도출된 경제윤리의 구현 시도가 N.A.M.(New Associaton Movement)이었으나 폐기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2. Platon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Aristoteles는 위의 문제의식에 관한 교육적 해결책을 모색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윤리적 경제를 모색하였으나, 윤리를 경제에 - 혹은 경제를 윤리에 - 대입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제를 포괄한 윤리를 검토하고, 윤리의 연장선상에서 정체를 탐구한 뒤, 이상국가의 구축을 교육에 요청한다. 왜냐하면 교육이 전제되지 않은 정체는 각종 견제방안을 구비한 혼합정이라 할지라도 변질되기 때문이다.
1. “오늘날 일본을 아는 이들은, 아니 일본에 잠깐이라도 여행을 해본 이들은 일본이 전 나라가 골고루 균형있게 발전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오래된 전통이 보존되어 있고 그것을 현대의 새로움과 조화시키고 있는 것은 물론 그러한 조화가 전국에 걸쳐 있는 것이다. 전통을 잇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시니세(老舗)라 불리는 회사와 가게들이다. 현재 일본에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이 2만여개에 이른다. 이동전화기 접는 부분에 들어가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교토의 다나카 귀금속사는 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이런 회사는 물론이고 교토에 가면 음식점도 300년 넘은게 있다. 그리하여 관련 연구자들을 그런 시니세가 10만이 넘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일본 최북단 홋카이도에서 최남단 가고시마까지 이런 기업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런 ‘전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70년대 일본에서는 다나카 총리가 ‘국토개조론’을 내걸어 나라 전체를 균형있게 개발하는 장기계획을 세워 시행해왔다. 이를 통해 일본은 이른바 ‘다초점 국가’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오래된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먼 앞날을 내다보는 균형잡힌 미래비전의 제시, 이것이야말로 정치가가 해야할 일인데, 한국의 대통령과 국무총리는 당장 5년 후의 표계산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참담하다.”
2. “일본의 신용평가조사기관인 데이코쿠 데이터뱅크에 따르면 일본에는 현재 약 125만개 기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시니세로 분류되는 업체는 1만9518개(1.6%)다. 특히 역사가 200년을 넘는 업체가 938개, 300년을 넘는 업체도 435개에 달한다. 미국의 패밀리비즈니스매거진에 의하면 현재 최고령 장수기업은 호텔업을 경영하는 호시(法師)료칸으로 718년에 호시 가문에 의해 창업된 이래 현재까지 약 1292년째 경영(현 경영자 46대)되고 있다. 모노즈쿠리(もの造り)와 시니세(老舗)는 20세기 일본경제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었다. 최근 도요타 리콜 사태로 인한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오랫동안 일본인이 자부심으로 여겨왔던 ‘장인정신’이 이제 그 수명을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3. “일본 기업의 특징을 설명할 때면 꼭 등장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모노즈쿠리(ものづくり)’다. 물건을 뜻하는 ‘모노’와 만들기를 뜻하는 ‘즈쿠리’가 합쳐진 말로 ‘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Louis Vuitton은 세계 1위 명품기업 LVMH(Louis Vuitton Moet Henessy)의 패션 브랜드 중 하나이다.
“명문 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사고로 불구가 되고, 서른일곱 살에 알콜 중독으로 죽은 난쟁이 화가. 난쟁이라는 신체적 불구가 귀족 로트렉에게 비극적인 운명을 안겨 주었다면, 화가 로트렉에게는 위대한 예술을 안겨 주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이 때로 가장 희극적이기도 하다는 말은 아마 로트렉의 인생이나 예술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