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그룹 산하의 인하학원 소속으로, 한국항공대학교와 같은 재단하에 있다.”
“국민공회는 그레고리력 대신 그리스도교와의 연관성에서 탈피하여 1793년 10월 5일 프랑스 혁명력을 만들고 그레고리력으로는 1792년 9월 22일을 첫날(혁명 원년, 방데미에르 1일)로 잡았다. 혁명력은 1806년 1월 1일 나폴레옹 체제가 시작되면서 다시 그레고리력으로 대체되었다.”
만년의 괴테는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평생 동안 엄청난 세계사적 사건들을 마치 일상사처럼 경험한 것이 나에겐 크나큰 득이 되었다”라고 했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대혁명 그리고 나뽈레옹전쟁 등 세계사적 사건들을 동시대인으로서 경험한 것이 자신의 창작에 커다란 자극과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괴테의 문학은 그러한 역사적 전환기의 도전에 대한 치열한 성찰의 산물로 파악할 때 비로소 진면목이 드러난다. 괴테는 미시적 개인사와 거시적 시대사를 조밀하게 결합하여 생동하는 인간상으로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괴테의 문학세계를 당대의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분석하여 괴테 문학의 근대성과 현재적 의의를 해명하고자 한다. 봉건 절대왕정이 붕괴되고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세계사적 전환기를 살았던 괴테는 근대화 과정에 수반되는 새로운 모순과 갈등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근대화의 복합적 국면에 대한 괴테의 문학적 성찰은 근대화의 명암을 속속들이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맹목적 근대주의의 편향을 교정할 수 있는 사유의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_ 임홍배, 2014. 12.
“5년 전에는 적어도 연출하던 걸 중간에 끊고 간 게 아니었다. 당시 광우병은 가장 핫한 이슈였기 때문에 이것을 교육방송에서 민감한 시기에 방송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반민특위 편’은 독립유공자 이야기로 교과서에도 나온 것이고 시기적으로 민감한 것도 아니어서 (사측의 제작중단 지시가) 대단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사측은 공방위 요구도 받지 않았다. 광우병 논란 때에는 공정방송위원회가 열렸고, 내용을 전부 수긍할 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정해진 절차에 따라 결론이 났는데 말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몰아간 분들에 대해 대단히 유감이다. 제작 중단 이후 제대로 해결된 게 없으니 참담했고 자괴감도 컸다. 자괴감이 들더라도 의욕이 있었다면 EBS에 남아 있을 텐데, 뭔가 할 수 있는 게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회사에 남기만 하는 건 월급 받아먹는 것밖에 안 되고, 그럼 스스로가 점점 망가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방법은 나오는 것밖에 없었다. 분명한 건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었다.”
_ 김진혁, 2013. 9. 2.
“뜬금없이 그런 시간이 찾아와요. … 할머니가 계시지만 대화는 안 해요. 엄마는 밤 10시쯤 퇴근하시고 아빠는 얼굴 보기가 힘들고…. 누나한테도, 친구들한테도 세월호 이야기는 안 해요. 안 하게 돼요. 친구들하고도 다른 이야기만 해요. 집에 가면 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방에서 문 닫고 휴대전화를 해요.”(오대현)
“경비원의 동료 78명은 그가 사망한 지 불과 12일 뒤, 올해 12월 말일자로 계약이 해지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서울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 동료의 분신에 어느 날 전원이 해고되는 게 가능한 이 나라에서, 사태의 책임을 죽은 노동자와 노동단체에서 찾는 ‘1등 신문’의 활자가 칼바람처럼 차갑다.”
조선이 더 큰 안목으로 역지사지를 권고하자, 시사인이 불가해한 적반하장이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형국이다. 조선은 모멸과 매도를 건드려 독자의 분노를 오해로 치환하고 있으나, 시사인은 굳이 주간지를 찾아 읽지 않아도 될 수준에서 ㅡ 그 논조가 응고되어 있다. 전혜원이 애써 울분을 삭히며 냉정을 잃지 않고자 했다면, 곽래건은 되려 감정을 자극해 비난을 거둬 들이게 한다.
옳으니까 옳아야 한다고 함은 동어반복이다. 옳음은 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식의 관철은 다소 억울하겠지만 김현의 단언처럼 파시즘과 닮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민주정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하다. 당혹스러우나, 조선이야말로 그것의 본질에 육박해 있다.
관건은 디테일이 아니다. 구체는 어느 지점에서 추상으로 전회해야 한다. 추상은 막연한 무엇이 아니다. 차원을 달리하여 자아와 상대를 초월하고 제3의 동의를 인수하는 사유의 노동, 이것이 추상이다. 양자를 다른 구도에 배치하는 의제 설정이 시사인에게 없다. 특종, 단독보도는 그물 안의 월척일 뿐이다. 혼동해서는 안 된다.
때가 되면 예술가는 가출을 감행해야 하는데, 물론 그가 떠나는 집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일가를 이루었다’는 말은 대가들에게나 쓰는 말이지만, 젊은 예술가라고 해서 자신이 지은 집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때가 왜 없겠는가. 최근에 신용목은 신용목을 떠났다. 지난 두 권의 시집을 질적으로 이끌었던 작품들, 예컨대 <갈대 등본>이나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같은 시와 함께 이 시인을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은 이번 시집을 읽고 이제 그가 더 이상 그 집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가출은 내용과 형식 두 측면에서 동시에 진행된 것 같다. ‘내용’에 대해서 일단 간단히 말해두자면, 그는 그의 ‘고향’을 떠났다. 그는 이제 파리에서 몇 년을 보낸 뒤 이윽고 다음과 같은 말을 중얼거리게 된 릴케의 말테Malte처럼 보인다. “그래, 그러니까 사람들은 살기 위하여 여기로 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여기서 죽겠다는 거 같은데”(말테의 수기). 지난 시집들에서 농경문화의 서럽고 아름다운 퇴적층들을 탐사했던 이가 이번 시집에서는 ‘살기 위해 도착해서는 오히려 죽어가는 곳’인 도시의 자서전을 적는 데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형식’에 관해서는 조금 더 길게 말하자. 그는 그의 ‘노래’도 떠났다. 이번 시집의 시들 중에서 단숨에 읽히는 것은 거의 없다. 단숨에 읽힌다는 것 자체는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다시 읽게 만드느냐 아니냐에 있으니까. 단숨에 읽혀도 되풀이 읽게 만드는 시라면 나쁜 시가 아닐 것이고, 힘들게 다 읽어도 첫줄로 되돌아가게 만들지 않는 시라면 좋은 시가 아닐 것이다. 신용목의 시는 힘들여 읽게 하고 다시 읽게 만든다. 어떤 경우에 이렇게 되는가. 핵심은 난해함 그 자체가 아니라 난해함의 구조가 논리적인가 아닌가에 있는데, 우리는 어떤 난해함 앞에서 이것이 통제되지 않은 미숙함의 흔적인지 명석한 논리의 산물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_ 신형철, 적국에서 보낸 한 철, <아무 날의 도시>, 문학과지성사,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