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김대중은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정책을 앞세운 첫 후보였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향토예비군 폐지 등이 대표적 예다. 박정희 캠프는 이에 맞서, 어이없데도, 대한민국 대선 역사상 처음으로 지역주의의 방아쇠를 당겼다. 이승만 정권 때는 물론이고, 5.16군사반란 이후 박정희가 윤보선과 맞붙은 두 번의 대선에서도 지역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윤보선 캠프가 집요하게 물고늘어졌던 1963년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는 사실상 호남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로 신승했다. 그러나 1971년 대선에서 공화당 의장 이효상이 들고나온 ‘신라 임금론’은 그 뒤 지금까지 한국 정치를 옥죄고 있는 영남패권주의의 시발점이 되었다. 다시 말해 1971년 선거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영남패권주의가 고개를 쳐든 선거였다.
(41) 변화를 읽지 못하는 완고함이 게으름의 한 형태라면, 아무데서나 변화를 읽어내는 과민함도 게으름의 한 형태다. 둘 다,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기 버거워 속 편한 환상으로 도피한다.
(70-71) 고종과 김일성을 놓고 누가 최악의 권력자였는지를 따지는 일이 힘든 것과 달리, ‘넘버 쓰리’는 쉽게 짚을 수 있다. 이승만이다. 하와이와 미국 본토를 오가며 강대국에 청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 가는 곳마다 불화를 일으켜 자신이 우두머리가 돼야만 직성이 풀렸던 사람, 해방 뒤 미국의 도움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한 사람, 그래서 민족분단의 문을 연 사람, 한국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남으로 줄행랑친 뒤 한강철교를 폭파해 서울 시민의 피난을 막은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서울에 있고 국군은 북진하고 있다는 거짓 방송을 내보낸 사람, 서울이 수복되자 한강을 못 건너고 인공 체제를 견딘 이들을 ‘잔류파’라 부르며 ‘부역자’로 몰아 단죄한 사람, 전쟁 발발 앞뒤로 제주도에서 거창에서 또다른 많은 곳에서 잔악한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사람, 공식적으로 전향한 이른바 보도연맹원들을 죄다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사람, 제 정적이면 좌익이든 우익이든 사정없이 제거한 사람, 전쟁 중의 대통령선거에서 자신의 세가 불리하자 계엄령을 내리고 헌법을 고쳐 다시 대통령이 된 사람, 전쟁이 끝나자 오직 저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중임 제한 철폐 개헌안을 발의해 국회 투표에서 한 표가 모자라자 ‘4사5입’이라는 해괴한 논리로 헌법을 고쳐 종신 대통령이 되고자 한 사람, 수도 서울의 수도를 제 호號 ‘우남’으로 바꾸고 싶어했던 사람, 독재와 부패와 부정선거에 맞선 전국적 시민항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그제야 마지못해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내뺀 사람,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서울 탑골공원과 남산에 제 동상을 세우고 환화貨에 제 얼굴을 새긴 사람.
(95-96) 대한민국 국가의 법적 정치적 역사적 기초가 일본군국주의의 부정이었던 만큼, 일본 육사를 나와 일제 괴뢰군에 복무했다는 사실은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큰 흠이다. 그러나 ‘친일분자 박정희’가 ‘폭군 박정희’를 압도하는 세평은 위험하다. ‘남로당원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일본제국주의를 떠받든 하급 장교였다는 사실, 건국을 전후해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다 동지들을 밀고하고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 따위는, 그가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대한민국 전체를 병영으로 만든 죄에 비하면 크달 수 없다. 그의 친일행위, 그의 공산주의 활동, 그의 비열한 전향 따위에는 이해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길게는 18년, 짧게 잡아도 7년(유신체제 또는 제4공화국이라 불렸던 1972~1979년)간 그가 잔인하게 저지른 군사깡패 두목 짓에는 용서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민족반역자를 넘어선 인륜 파괴자였다. 정적 탄압만을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가 죽이고 싶을 만큼 김대중을 미워하고 불안해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인혁당 사건은 그가 저지른 가장 유명한 인간 백정질이지만, 그것이 널리 비난받았다는 점에서 얼마쯤 정의가 회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의 정적이나 비판자들만을 학대한 것이 아니다. 선거가 다가오거나 여론이 나빠질 때마다 터지곤 했던 간첩 사건 가운데는, 도무지 영문 모를 일이 많았다. 그 조작된 간첩 사건에 연루돼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망쳐버린 이들이 박정희 정적이나 비판자들만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그야말로 ‘재수 없이’ 엮인 이른바 ‘컬래터럴collateral’이었다. … 그러고 보면 김재규는 박정희의 가장 큰 은인이다. 인간 도살자에게 순교자 이미지를 입혔으니 말이다. 박정희를 존경하는 것은 자유다. 세상에는 별 사람, 별별 취향이 다 있으니까. 그러나 그 이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사람 할 짓이 아니다. 무고하게 그의 손에 죽거나 다친 이들의 직계가족이 지금도 살아있으니 말이다. 꼭 그를 찬양하고 싶으면, 죽기 직전 상태에 이르도록 물 담긴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있거나 고압 전류를 온몸에 흘려보라. 또는 인연이 닿는 조폭에게 부탁해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얻어맞아보라. 그러고 나서 아는 검사나 판사에게 부탁해 괜히 10년이고 15년이고 감옥살이를 해보라. 그 감옥살이 동안 역사학자 한홍구의 글을 읽어보라. 그 뒤에도 사람들 앞에서 박정희를 찬양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병은 죄악이 아니고, 병증은 설득으로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니.
(274-275)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꼽히는 가우스는 일흔이 넘어서도 지적 활기가 졸아들지 않았다. 가우스의 인격에 대해서 이런저런 험담을 늘어놓는 수학사가들도, 그의 지적 능력이 10대 때나 만년에나 별 차이 없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려보아도, 예컨대 일흔 앞뒤인 영문학자 김우창 선생이나 유종호 선생의 글은 그들의 청장년기 때 글만큼이나, 어쩌면 그때보다 더 명료하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장년기를 통과하면서 학문적 전성기를 마친다는 사실도 엄연하다. 20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황제로 군림했던 사르트르가 지적 정점에 이른 것은 30대 후반에 쓴 <존재와 무>에서였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기록한 그의 만년은 추레한 노인의 일상으로 심란하다. 학자 사르트르만이 아니라 작가 사르트르도 그 전성기는 30대 때였다. 사실 예술적 상상력은 학문적 능력보다 쇠퇴과정이 빠른 것이 상례다. 첫 시집이 제 대표 시집이 되는 시인은 문학사에 지천이다. 심지어 도덕적 판단 능력이라는 것도, 나이와 함께 무져진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나이와 함께 더 벼려지는 것도 아니다.
_ 고종석, <정치의 무늬>, 알마,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