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November, 2010

November 28, 2010: 1:40 am: bluemosesErudition

EBS 교육대기획 10부작 <학교란 무엇인가>

3부: 이우학교 이야기, 4부: 세계 최고의 고등학교

: 1:07 am: bluemosesErudition

* 11월 24일 북한의 “연평도 폭격”으로 인해 오워의 전쟁 예언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다. <크리티아스>에 기록된 “아틀란티스”의 멸망이 겹쳐진다.

*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연유는 이러하네. 여러 대에 걸쳐 신의 본성이 그들을 지배할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 덕 이외에 모든 것을 경멸하였고 갖고 있는 재산 같은 것도 하찮게 여겼을 뿐 아니라 막대한 황금이나 그 밖의 재물 같은 그런 무거운 짐도 거뜬히 감당해 냈지. 그래서 그들은 부의 사치스러움에 취해 자제심을 잃어 그들 자신을 망쳐 버리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우애로운 교분을 통해 덕과 함께 불어나는 것임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었다네. … 그러나 그 신적인 부분은, 여러 사멸하는 것들과 수차에 걸쳐 뒤섞여짐으로써 그들에게서 점차 줄어들게 되었고, 오히려 인간적 성정이 우위를 차지하기에 이르자 그들은 급기야 갖고 있는 재물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 평정을 잃어,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파렴치한 자로 간주되었네. 가장 귀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 … 참되고 행복한 삶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시의 왕들이 가장 아름답고 복된 사람들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네. 사악한 탐욕과 권력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인데도 말일세.”(120e~121c)

* 그렇다.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평온의 피격이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최영미의 <지하철에서1>이 떠오른다. “나는 보았다. 밥벌레들이 순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 1:01 am: bluemosesErudition

“But, insofar as they succeed, they create a recurrent problem for themselves. For workers are also consumers and capitalism requires consumers with the purchasing power to buy its products. So there is tension between the need to keep wages low and the need to keep consumption high.”

_ Capitalism has solved this dilemma, MacIntyre says, by bringing future consumption into the present by dramatic extensions of credit.

November 26, 2010: 7:15 pm: bluemosesErudition

1.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지난 30년을 돌아보면 주류 자유시장 경제학자들보다 비주류 학자들의 조언이 더 유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주류 경제학자의 대표적 예로 앨버트 O. 허시먼을 꼽았다.”

2. “18세기 프랑스 혁명과 인권선언, 19세기 보통선거 도입, 20세기 복지국가 수립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례와 논쟁을 분석해 변화에 ‘반동(react)’하려는 3가지 논리를 정리했다. 역효과(perversity), 무용(futility), 위험(jeopardy)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3. “‘왕권ㆍ교회ㆍ귀족과 민중의 파괴 위에 세워진 비천한 과두정치는 인간의 권리나 평등에 대한 모든 거짓된 꿈과 희망을 종식시킬 것이다. 학살, 고문, 처형! 이것이 이른바 인권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관한 고찰>(1790)에서 한 이런 추측은 신성동맹 시대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 되는 역사법칙으로 굳어졌다.”

* Albert O. Hirschman(1991). The Rhetoric of Reaction: Perversity, Futility, Jeopardy

: 12:14 pm: bluemosesErudition

1.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u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Because it was grassy and wanted wear;

Though as for that the passing there

Had worn them really about the same,

 

And both that morning eqully lay

In leaves no step had trodden black.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

I took the one less travel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2. 피천득 옮김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3. 김종길 옮김

노랗게 물든 숲 속 두 갈래 길을

다 가 보지 못할 일이 서운하여서,

풀섶 속에 길이 구부러지는,

눈 닿는 데까지 오래오래

우두커니 선 채로 바라보았네.

 

그리곤 나는 갔네, 똑같이 좋고,

사람이 밟지 않고 풀이 우거져

더 나을지도 모르는 다른 길을,

사람이 별로 다니쟎기론

두 길은 실상 거의 같았네.

 

그리고 두 길은 다 그날 아침

밟히쟎은 가랑잎에 덮혀 있었네.

아 첫째 길은 훗날 가리고 하고!

길은 길로 이어짐을 알았기에

돌아오진 못하리라 생각했건만.

 

세월이 오래오래 지난 뒤에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리.

두 길이 숲 속에 갈라져 있어

사람이 덜 다닌 길을 갔더니

그 때문에 이렇게도 달라졌다고.

 

4. 정현종 옮김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5. 천승걸 옮김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음으로 해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었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라고.

: 11:45 am: bluemosesErudition

1-1.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_ 朱熹(1130~1200), <朱文公文集> 勸學文.

1-2. “白日依山盡, 黃河入海流, 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_ 王之渙(688~742), 登觀鵲樓.

 

2-1. 배움(Eruditon)은 일종의 모순적인 사태이다. 주어진 틀을 체화하고 또 그것을 넘어서는 이중적인 작업이기에 그러하다. 토마스 쿤의 ‘본질적 긴장’(essential tension)을 기억하자.

2-2. “쿤은 과학연구에 있어서 ‘발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라고 부를 수 있는 자유롭게 사고하고 다양한 대안을 편견 없이 고려하는 열린 마음의 연구태도뿐 아니라, ‘수렴적 사고’(convergent thinking)라고 부를 수 있는 연구태도도 역시 매우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 두 가지 사고를 중시하는 과학연구 방법은 당연히 서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쿤은 과학활동에 있어서 이 두 사고들간의 ‘본질적 긴장’(essential tension)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과학적 창조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본 발표에서는 쿤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하여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창조성을 발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과학적 창조성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가려 한다.”(이상욱)

November 25, 2010: 3:24 am: bluemosesErudition

1. “국제정치학 내부의 현실주의자들이 각국의 군사력 중심의 힘을 이야기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심지어 현실주의자들 중 가장 핵심 인물인 케네스 월츠(Kenneth N. Waltz)도 멍청하게 곧바로 그러한 종류의 힘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구조 역학 내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나라를 중심으로 다른 나라들이 뭉칠 때에 단순히 그 나라에게 눌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나라는 충분한 유인을 제공한다는 것이 월츠의 가설이다. 즉, ‘신현실주의’라는 현실주의자들의 최근 이론은 단순히 일국의 억지력 수준의 논의는 촌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일보의 논점은 국제정치학의 가장 ‘강력한’ 이론에 견주어 볼 때에도 촌스럽다.”

2. “자유주의-좌파의 입장을 따르자면, 이번 연평도 사태는 전적으로 거버넌스의 실패, 즉 통치-관리의 실패라고 말할 수 있다. 1)동아시아 국제정치의 구조적 역학에 대한 무지, 2)이념에 치우쳐 ‘실용주의’를 채택하지 못하는 무능함, 3)협상능력의 결여 등이 모두 합쳐진 상황이라 말할 수 있다. … 대부분의 사태들은 몇 번의 기회를 놓치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경로로 휘말려 들어갔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번 일도 그런 것으로 보인다.”

* “로버트 콕스(Robert Cox)의 개념을 빌자면 어떠한 운동이나 권력이 작동하려면 물적 능력, 제도-기구, 이념이 있어야 하는데, 1과 2가 부재하다. 평화운동은 아직 실효적이지 않다.”

: 3:00 am: bluemosesErudition

“詩는 無形畵요, 畵는 無聲詩다.”(안휘준)

November 24, 2010: 10:02 pm: bluemosesErudition

1.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1959~)가 2006년 미국 금융체제와 자산시장 구조를 분석하여 서브프라임 시장 붕괴를 필두로 한 전면적인 금융 붕괴(meltdown)의 가능성을 경고했을 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구적 금융체제의 일대 파란을 예고하는 루비니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선정성’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을 테지만, 경제학자들에게는 그의 논리와 주장이 너무나 이단적인 것으로 보였다. … 당시 학계의 어느 저명한 경제학자가 말했듯이, ‘루비니의 주장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수리 모델이 없다’는 것이었다.”

2. “수리 모델 대신 루비니가 가지고 있었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지구적 자산 시장의 상호 연관 그리고 이를 감싸는 금융 체제 전반의 돈의 흐름을 꼬장꼬장하게 기록하고 따지는 것이었다. 루비니의 업적에 대해 조금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상 물리학의 상대성 이론과 같은 기상천외의 독창성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성실한 관찰자의 꼼꼼한 현실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3. “국가 재정의 금고를 불리는 방법에 대한 연구에 불과했던 정치경제학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 영구불변의 자연법적 질서를 찾아내는 학문으로 심화(혹은 변질)되었다. … 시장의 완벽성이라는 “자연법”에 대한 신앙은 이후 오늘날까지 300년이 흐르도록 무너지기는커녕 갈수록 더 강화되어왔다.”

4.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내재한 법칙이 … ‘조화’가 아니라 ‘위기’라고 주장하는 “위기의 경제학”은 이미 19세기부터 존재했었다. … 시장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실물” 영역에서 찾고자 했고, 이 모순을 전면적으로 부각시킨” 최초의 인물은 시스몽디(Simonde de Sismondi, 1773~1842)였다. “시장주의자들이 신봉하던 ‘수요와 공급은 반드시 일치하게 되어 있다’는 이른바 ‘세이의 법칙(Say’s Law)’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자본주의의 소득분배 구조상 유효수요가 필연적으로 부족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위기와 공황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초 홉슨(J. A. Hobson)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5. “20세기 위기의 경제학은 ‘실물’이 아닌 ‘금융’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찾기 시작한다. 20세기 들어 거대한 규모로 벌어진 자본 시장의 발전, 공고하고 잘 짜인 금융 체제의 성립 등이 나타나자 금융은 더 이상 예전에 생각하는 것처럼 실물 영역의 생산과 분배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위치를 훨씬 뛰어넘어서 오히려 생산과 분배와 소비 전체를 조직하는 핵심적 계기를 틀어쥐고 있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케인스는 이 점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했던 이들 중 하나이다. 그는 비슷한 통찰에 도달했지만 그래도 금융 부문의 균형은 결국 실물 부문의 균형에 종속되게 되어 있다는 동시대인들의 낙관론에 맞서서, 그렇게 핵심적 계기를 틀어쥔 금융의 영역이 투자자와 금리 생활자의 심리학처럼 생산의 합리성과는 전혀 동떨어진 원리들로 좌우되는 영역이라고 강조하였다.”(cf. liquidity preference theory)

6. “케인스의 본래 논지에 충실하여 금융 부문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의 경향성을 찾아나가는 작업을 이은 이가 하이먼 민스키(Hyman Misky)이다. 민스키는 슘페터의 신용화폐론과 은행이론에 근거하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적 영리기업과 은행의 행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일종의 ‘제도주의적 전환’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금융시장은 필연적으로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금융위기가 생겨날 경우 부채 디플레이션의 형태로 만성적인 공황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자본주의 영리기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과도한 부채에 의존하는 폰지(Ponzi) 상태가 될 수밖에 없으며, 스스로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에 불과한 은행은 이를 부추기면서 결국 경제 전체를 과도한 부채 상태로 몰고 가는 원동력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cf. Post/New-Keynesian)

7. “정말로 그는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을까? 그가 비판한 지난 몇 십 년간의 금융 체제를 만들어낸 현실의 힘들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과연 이 위기를 통하여 이 힘들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민스키의 경우 상당한 아이러니와 냉소를 섞어서 그런 식의 은행 청산이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고 보지 않았는가? …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분석에 아주 중요한 열쇳말 하나가 빠져 있다는 점으로, 그것은 권력이다.”(cf. Capital as Power)

8. “자본주의의 금융 체제가 그와 같은 불안정하고 모순된 모습을 띠는 원인에 대해서, 금융가들의 탐욕과 규제 및 정책 입안자의 무지 및 근시안만이 지적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이를 지적하는 견해로 사회 여론을 계몽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의 금융 체제가 그러한 모습을 띠게 되는 필연성이 더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자본주의의 ‘권력’ 체제에 있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계몽의 노력이 이 앞에서도 효과를 가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제부터의 상황 전개에 대한 설명력도 계속될 수 있을까?”

9. “비록 <유한계급론>의 저자로만 자꾸 왜소화되어 왔지만, 베블런의 진정한 주저라고 할 <영리 기업의 이론(The Theory of Business Enterprise)>의 7장에는 기업들의 ‘금전적(pecuniary) 자본 축적’의 논리가 어떻게 해서 일방적인 자산 시장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는가 그리고 금융 체제의 유동성 공급이 어떻게 이것과 결합되며 그 결과 현실의 경기 변동이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대한 일관된 논리가 개진되어 있다. 베블런이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는 열쇳말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탐욕과 무지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독점하고 지배하려는 영리 기업 부문 전체의 ‘권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단순히 건전하고 투명한 금융 체제의 재건이나 부실 기관의 청산과 같은 차원을 넘어서 금융 부문이 사회 전체에 대해 누리는 부당한 권력의 구조 자체를 개혁할 것을 지향하고 있다.”

* 탐욕과 권력을 연계한 것을 일컬어 “영향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November 22, 2010: 11:16 pm: bluemosesErudition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했다. … 그래서 그는 유토피아주의자 또는 지나친 이상주의자를 공격했다. 그는 마르크시즘이나 과학에 대한 신뢰는 악의 근원이 인간의 외부 어딘가에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 근거한다고 보았다.”

* 저자는 제목이 함의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부제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