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자, 그런데 조금도 특이할 것이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이 시구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일까.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우리가 대개 그러려니 하고 당연한 것으로들 여겨왔지만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이것을 제대로 신기해하는 일, 그 힘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일이 시를 만나러 가는 첫 걸음이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시에 대한 많은 지식들 - 시는 이런 것이다, 또는 저런 것이다 하는 온갖 정의들이며, 정형시ㆍ자유시ㆍ운율ㆍ이미지 등을 동원한 시에 대한 갖가지 분류, 설명, 분석 등 - 이 실은 모두 이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궁금증의 결과들이다. 그러니 시라는 현상에 닿고자 한다면 선무당 사람 잡는 어설픈 외국이론이나 유식有識에 기대기 전에 이 소박한 물음을 제대로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7~18. 대부분의 시들은 그러한 정성의 지불에 값할 만큼의 알맹이를 가지고 있다.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나, 본디 시인이란 자기 삶의 가장 순결한 형식으로 시를 섬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이에게는 하잘것없을 글 몇 줄에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 시인이다. 한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삶을 걸어 애쓸 때 거기엔 그럴만한 곡절이 있게 마련이며, 그 사람 나름의 절실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절실함을 항해 우리는 겸허히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18~19. 시를 포함하여 문학예술은 부분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여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의 문제와 더 인연이 깊은 분야이다. 다시 말해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은 추상적인 개념을 매개로 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물적實物的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에 주로 의거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사물에 대한 공감과 정서적 일치에 의해 도달되는 앎의 한 범주이며, 그런 만큼 그것은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다. 따라서 시를 쓰고 읽기 위해서는 개념의 운용 능력보다는 실물적 상상력의 운용 능력이, 공감과 일치의 능력이 더 긴요하게 연습되어야 한다. 그러한 합당한 감상의 토대 위에서라야 올바른 분석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문학에 임하는 상상력은 이러한 표피적 사실 진술에 잘 만족하지 못한다. 그날 새벽 이순신의 조반상 위에는 어떤 음식이 올랐는지,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 것인지, 그날 바다 빛깔은 어땠는지, 세수는 제대로 했을 것인지, 옷차림은 어땠을 것인지, 방문을 나서는 그의 수염발이 동짓달의 바닷바람에 어떻게 쓸렸을 것인지
, 휘하 병사들 하나 하나는 그 심경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 것인지 등등까지를 궁금해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문학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실물적 상상력 - 거짓말과 구별되는! - 인 것이며, 학술적 진리를 포괄하면서 더 우월한 산 진실로 나아가는 문학의 힘인 것이다.
_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도서출판 b,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