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December 3rd, 2017

December 3, 2017: 8:53 pm: bluemosesErudition

16. 자, 그런데 조금도 특이할 것이 없는 말들로 이루어진 이 시구의 그 무엇이 우리에게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일까.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우리가 대개 그러려니 하고 당연한 것으로들 여겨왔지만 다시 곰곰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이것을 제대로 신기해하는 일, 그 힘의 정체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일이 시를 만나러 가는 첫 걸음이다. 수천 년에 걸쳐 축적된 시에 대한 많은 지식들 - 시는 이런 것이다, 또는 저런 것이다 하는 온갖 정의들이며, 정형시ㆍ자유시ㆍ운율ㆍ이미지 등을 동원한 시에 대한 갖가지 분류, 설명, 분석 등 - 이 실은 모두 이 불가사의한 힘에 대한 궁금증의 결과들이다. 그러니 시라는 현상에 닿고자 한다면 선무당 사람 잡는 어설픈 외국이론이나 유식有識에 기대기 전에 이 소박한 물음을 제대로 간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7~18. 대부분의 시들은 그러한 정성의 지불에 값할 만큼의 알맹이를 가지고 있다.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모두가 그렇지 못할지는 모르나, 본디 시인이란 자기 삶의 가장 순결한 형식으로 시를 섬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별 흥미를 못 느끼는 이에게는 하잘것없을 글 몇 줄에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이 시인이다. 한 인간이 무엇인가 자기 삶을 걸어 애쓸 때 거기엔 그럴만한 곡절이 있게 마련이며, 그 사람 나름의 절실함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절실함을 항해 우리는 겸허히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18~19. 시를 포함하여 문학예술은 부분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에 관여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의 문제와 더 인연이 깊은 분야이다. 다시 말해 시를 쓰거나 읽는 일은 추상적인 개념을 매개로 한 논리적, 분석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물적實物的 상상력을 토대로 한 정서적 공감과 일치에 주로 의거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사물에 대한 공감과 정서적 일치에 의해 도달되는 앎의 한 범주이며, 그런 만큼 그것은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다. 따라서 시를 쓰고 읽기 위해서는 개념의 운용 능력보다는 실물적 상상력의 운용 능력이, 공감과 일치의 능력이 더 긴요하게 연습되어야 한다. 그러한 합당한 감상의 토대 위에서라야 올바른 분석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문학에 임하는 상상력은 이러한 표피적 사실 진술에 잘 만족하지 못한다. 그날 새벽 이순신의 조반상 위에는 어떤 음식이 올랐는지, 그의 심경이 어떠했을 것인지, 그날 바다 빛깔은 어땠는지, 세수는 제대로 했을 것인지, 옷차림은 어땠을 것인지, 방문을 나서는 그의 수염발이 동짓달의 바닷바람에 어떻게 쓸렸을 것인지
, 휘하 병사들 하나 하나는 그 심경과 얼굴 표정이 어땠을 것인지 등등까지를 궁금해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문학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실물적 상상력 - 거짓말과 구별되는! - 인 것이며, 학술적 진리를 포괄하면서 더 우월한 산 진실로 나아가는 문학의 힘인 것이다.

_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도서출판 b, 2013.

: 8:28 pm: bluemosesErudition

왜 국민들에게 각인된 인지도 높은 기자는 없었던 것일까? 기자라는 직업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내보이는 건 아닐까 고민하며 떠올렸던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

첫째, 저널리즘은 이제 글쓰기 작업이 아니다. 글쓰기만으로는 저널리스트의 생명을 이전처럼 이어가기 힘들다. ‘대중 앞에서 말하기’가 저널리즘에서 비중이 커지고 있다. 종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대로 사회 이슈의 최종 전달자는 평론가, 변호사, 작가들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은 기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고 시사 프로그램에 등장해 이슈를 파고드는 그들은 결국 저널리스트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미 김어준씨나 김용민씨는 스토리텔러로서 대중의 마음을 얻고 지상파 방송까지 섭렵하고 있다. 왜 이들이 저널리스트가 아닌가?

둘째, 이제는 저널리즘도 글쓰기가 아닌 콘텐츠 프로듀싱이다. 플랫폼의 변화와 함께 제작 스튜디오와 사무실서 실감하는 건 대학생 인턴이 우리 두세 명 이상의 몫을 감당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글과 생각의 깊이로 비교하자면 우리가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하겠지만 콘텐츠 제작과 생각의 창의성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저널리스트가 콘텐츠 제작에서 이렇게 계속 떠밀린다면 그들과 우리 중 누가 저널리스트로서 생존해 남을 것인가? 이는 방송사에서 해직 당한 뒤에도 콘텐츠 기획제작자로서 자리를 굳힌 최승호 PD나 이상호 기자의 사례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발목을 잡는 건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두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첫째는 보도자료이다. 깔끔히 정리된 보도자료, 그리고 부수적으로 필요한 몇 가지를 얹어주는 백브리핑, 거기에 발로 뛰는 수고를 덜어주는 포털 검색은 기자들이 현장 경험을 넓히고 사회 이슈에 대해 깊이 공부하는 걸 막고 있다. 홍보를 원하는 기관이 만든 보도자료를 읽고 그 기관 사람에게 추가 설명을 부탁하고 취재가 끝나는 기자들의 매너리즘이 기자 스스로의 권위를 침몰시키고 있다. 두 번째 요인은 당연 출입처이다. 출입처에서 만난 지식과 경륜이 뛰어났던 숱한 동료기자들을 기억한다. 늘 취재에 앞서 가며 경쟁자를 주눅들게 만들던 그들은 어디론가 가고 없다. 출입처를 배정받을 연배를 지나면 논설위원실 행이고 거기도 아니면 어디에선가 목표를 잃은 위성처럼 궤도를 그저 돌고 있는 것인가?

기자는 기자면 된다고 자부심과 긍지를 추슬러보지만 기자라는 직업은 미술관의 조형물이 아니다. _ 변상욱, CBS 대기자

: 8:21 pm: bluemosesErudition

무뢰파, 역전된 애착 관계, 완벽주의, 외톨이

: 8:07 pm: bluemosesErudition

말에 머무르는 것. 얽매임. 묶인다.

: 8:05 pm: bluemosesErudition

양육 / 침범

: 8:02 pm: bluemosesErudition

“중독에 빠진 남편을 구하려는 아내도 관계중독인 경우가 있는데, 이를 ‘동반의존증(co-dependency)’이라 부른다. 이는 남편이 중독에 빠질 때 아내는 남편에게 중독되는 것이다. 즉 배우자를 구하겠다는 책임감에 불타서 자신의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중독자들과 오랫동안 같이 살아온 가족들은 자신도 모르게 중독자를 도우려는 중독 즉, 동반의존자가 된다. 동반의존이란 ‘의존 상태에서 누군가의 파트너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독치료의 전문가 로버트 서비(Robert Subby)는 동반의존이란 ‘억압적인 규칙과 습관들에 오랫동안 노출된 결과 개인적 혹은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서·심리·행동 상태라고 말한다. 어니 라슨(Earnie larsen)은 동반의존을 ‘사랑을 주고받는 인간관계의 능력이 손상되어 빚어진 자기 파괴적이고 학습화된 행동들 또는 성격 결함’이라고 말한다. 이 정의보다 비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중독자의 가족들은 동반의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동반의존이란 스스로를 돌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죠. 동반의존자가 된다는 것은 내가 알코올중독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가 ‘알아논’(Al-Anon: 알코올중독자 가족의 자조 모임)에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요. 동반의존이란 내가 알코올중독자에게 지나치게 빠져 있다는 것을 뜻하죠. 동반의존은 내가 항상 착 달라붙어 있어야 하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죠.”

: 7:43 pm: bluemosesErudition

“한적한 오후다 / 불타는 오후다 / 더 잃을 것이 없는 오후다 / 나는 나무 속에서 자본다.”

_ 故 오규원의 절명시

: 6:11 pm: bluemosesErudition

관계는 홑줄이어야 한다. 겹줄이 되면 어그러진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하지 않는다.

: 6:10 pm: bluemosesErudition

1999년 <군대간 형제에게 축복송>의 군목 김요한이, 2017년 <지렁이의 기도>를 펴낸 새물결플러스 대표 김요한이다.

: 6:00 pm: bluemosesErudition

“O Lord our God, you answered them; you were a forgiving God to them, but an avenger of their wrongdoings.”(Psalms 99:8)

“If we confess our sins, he is faithful and just to forgive us our sins and to cleanse us from all unrighteousness.”(1 John 1:9)

God desires to receive those who confess their sins and return to him, and he desires to dwell in their midst. Let us quickly return to God who embraces us through his limitless mercy if we just revert our hearts and actions and confess our sins, no matter what sins we may have commit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