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for December 6th, 2017

December 6, 2017: 10:36 pm: bluemosesErudition

10~11. 무진엔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38.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누군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 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 주었다. 그 여자는 처녀는 아니었다.”

_ 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2007.

: 9:00 pm: bluemosesErudition

‘피 칠갑’ 대신 ‘헤모글로빈의 시인’

: 9:00 pm: bluemosesErudition

1. 메논을 기점으로 라캉과 엘리스 그리고 헤스컷을 경유해 얽매임에서 벗어나 탁월함에 이르는 길 _ “가장합시다”(C. S. 루이스)

2. 협곡의 횡단. 리주토의 <살아있는 신의 탄생>에 토대한 ‘하나님 이미지’ 치유의 사전/사후 진단

3. 역사적 인과율은 어쩌면 일종의 전가요 안주다. 그래, 애석하게도 누군가 유리창을 깼다. 그런데 왜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는가.

4. 여기에 부르디외와 루만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렇다면 언제 각성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헐벗음이 실존을 위협할 때가 아니라 다른 사회를 지향할 때이다. 다만 문제는, 각성이 언제나 이미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에서 뛰어라!”를 대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과거 나치 체제 하에서 비판 이론을 앞세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맞닥뜨린 한계가 바로 이점이었다. 부정 변증법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긍정적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Žižek, 2009: 15). 설령 주체가 각성을 경험한 뒤 니체의 초인(超人)을 따라 이상적인 삶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자아 내지 정체성은 구조가 부여하는 위치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로 얽혀져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현실을 초극한다 한들 체제의 변화를 동반하지 못한다면 무기력한 니힐리즘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이 지적하듯, 사회의 상식과 관념은 우리가 각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현실의 변혁 없이 넘어설 수 없는 ‘초월론적 가상’이다. 가령 상품 물신주의는 대중의 내면에서 생성된 탐욕의 발로라기보다는 사회적 현실 속에 배태된 욕동이라고 할 수 있다(柄谷行人, 2005). 다음의 예화는 이에 대한 유용한 설명을 제공한다. “우리는 상품 물신주의에 대해 수강한 부르주아 주체를 상상할 수 있다. 강의가 끝난 후 그는 교수에게 자신은 여전히 상품 물신주의의 회생자라고 불평한다. 그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사태의 진상이 무엇인지, 상품은 단지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이며 거기에는 어떤 신비한 힘도 없다는 것을 알지 않소!’ 이에 대해 수강생은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잘 압니다. 하지만 내가 취급하는 상품은 그걸 모르는 것 같거든요.’(Žižek, 2007: 145~146).”

: 8:18 pm: bluemosesErudition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매체 특성상 신춘문예와 신인상은 당선작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신문사가 주최하고 매년 심사위원이 바뀌는 신춘문예가 일정 수준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작품을 당선시킨다면, 출판사 신인상은 해당 출판사의 문학적 성향에 맞는 작품을 최종 낙점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신인상 심사를 주도하는 문학출판사 편집위원들이 30~40대 젊은 비평가인데 비해, 신춘문예의 경우 통상 50~70대 중견 원로 문인들이 최종심을 담당해 “적어도 지금까지는 훨씬 보수적인 선택”을 한다. 이 평론가는 “문예지는 특정 독자가 보기 때문에 실험적이거나 진보적이라도 독자가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며 “반면 신춘문예는 신문, 그것도 1월 1일자에 실리기 때문에 평균적인 문학 감수성에서 받아들이기 불편한 작품이 나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 4:34 pm: bluemosesErudition

207~208. 그의 시세계의 중요한 변화는 5번째 시집인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이후 나타난 ‘극서정시’의 경향이다. ‘극서정시’란 시 속에서 드라마처럼 인간의 정신이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서정의 제한된 틀에서 벗어나 인간 존재의 양태를 다양하게 파악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한 것이다. 여기서 ‘변화’란 추상의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자신의 관념을 체험으로 용해시키는 육화의 과정이다. 이후 펼쳐진 그의 많은 여행은 관념을 형상으로 바꾸어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이려는 탐색과 고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08. 그가 보여준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1982년에 시작되어 1995년에 종결된 「풍장」 연작이다. 이 시는 40대 중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한 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시그이 변화 과정을 담은 보고서다. 시인은 죽음을 명상함으로써 오히려 생명의 신비로움과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주제로 오랫동안 시를 쓰는 과정에서 삶과 죽음을 대하는 지혜를 얻은 것이다.

222. 황동규의 「풍장」 연작은, 14년이라는 시간적 숙성의 기간에 있어서, 그리고 70편으로 구성된 작품의 질량과 시적 품격에 있어서, 우리 현대 시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빛나는 성취다. 이 시편들은 표면적으로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삶의 문제, 생명의 문제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시인 자신이 연작을 끝내면서 “초월은 결국 초월을 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 14년이 걸렸다”고 말한 것처럼 「풍장」 연작은 삶과 죽음의 분별을 넘어서서 삶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전환점이 되었다.

229~230. 시인은 1997년 1월 오른쪽 귀의 진주종 수술을 받았다. 네 시간 반에 걸친 큰 수술이었고 그 후유증으로 안면신경마비가 와 재입원하기도 했다. 퇴원 후 베란다의 날을 보니 그동안 돌보지 못해 그런지 흑반이 잔뜩 끼어 시들고 있다.

244. 1970년대 후반 이후 극서정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시 속에서 드라마처럼 인간의 정신과 행동에 변화가 일어난 양상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기존 서정의 틀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체험의 층위에서 인간 존재를 파악하려는 작업을 전개했다.

244~245. 1982년에 시작되어 1995년에 종결된 「풍장」 연작은 단일한 주제로 일관한 연작의 모범적 전례를 남긴 성과로, 40대 중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정신적 원숙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이 어떠한 변모와 심화의 과정을 거치는가를 보여주었다.

_ 황동규, <삶을 살아낸다는 건>, 휴먼앤북스, 2010.

: 2:14 pm: bluemosesErudition

5. 푸코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에 관해서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때였다.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소설 <나자>의 신비로운 주인공이 미친 여자로 취급되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지 그리고 정신과 의사들이 정의하는 광기는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우연히 <광기의 역사>를 읽은 것이 푸코의 세계로 들어간 출발점이었다. 그 후 ‘콜레주 드 프랑스’ 취임 강연인 <담론의 질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 <말과 사물>,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가 붙은 <감시와 처벌> 등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공부하던 프랑스 문학에서와는 아주 다른 새롭고 충격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중략) 내가 초현실주의를 좋아하게 된 동기가 ‘삶을 변화시키자’는 랭보의 명제와 ‘세계를 변혁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종합하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시적 혁명 때문이었는데, 그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전복적 사유와 한계 경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한 푸코의 삶은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6~7. 결국 내면의 갈등과 근원적 욕망의 추동으로, 짐을 싸들고 파리로 올라간 것은, 아마도 푸코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파리에서 만난 지도교수 때문에 논문주제를 바꿀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논문 계획서를 갖고 씨름하던 중,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 것이 푸코의 책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만약에 프로방스를 떠나지 않고, 처음에 계획했던 주제를 발전시켜 그대로 연구를 진행했다면, 아마도 푸코를 알지 못했거나, 알게 되더라도 피상적인 이해에 멈췄을 것이다. (중략)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면서 푸코를 읽음으로써 내가 변화했다는 것을, 또한, 그의 책이 ‘모든 것을 다르게 만들’ 만큼의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7. 1983년 초에 귀국하여 2년쯤 지나서 “미셸 푸코, 지식과 권력의 해부학자”라는 제목의 글을 시작으로 1990년대 말까지 몇 편의 논문들을 발표했다. 그리고 한 10년쯤 연구를 중단하다가 2011년 8월에 정년퇴임한 이후 1년 반 동안 집중적으로 푸코에 관해 5편의 논문을 쓰고, 이전에 쓴 논문들을 수정하는 작업을 했다. 수정작업 중에 폐기처분한 글이 두 편 있었고, 어떤 글은 완전히 새로운 논문으로 탈바꿈해서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그 논문이 “고고학과 계보학”이다. 결국 12편의 논문들 중에서 6편은 퇴임 전에, 6편은 퇴임 후에 썼다고 할 수 있으니까 이 책을 쓰는 데 걸린 시간 혹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데 소용된 시간은 30년쯤 되는 셈이다.

_ 오생근, <미셸 푸코와 현대성>, 나남, 2013.

: 1:53 pm: bluemosesErudition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朱子)

: 12:06 pm: bluemosesErudition

O자 다리는 무릎에서 딱딱 소리가 난다.

: 12:03 pm: bluemosesErudition

1972년 6월 8일, 닉 우트는 남베트남 군이 사이공 외곽 트랑 방에 네이팜 탄을 오폭했을 때 괴로워하던 아홉 살 킴 푹의 사진을 찍었다. 우트는 푹이 베트남어로 “너무 뜨거워! 너무 뜨거워!”라고 비명지르던 것을 기억한다.

: 11:57 am: bluemosesErudition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극이 가장 좁은 분야가 사진이라고,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은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