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만인가. <대학내일>을 훑어 보았다.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없어도 되는 자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가는 거, 그런 게 ‘싫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너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얼마만인가. <대학내일>을 훑어 보았다.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없어도 되는 자리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가는 거, 그런 게 ‘싫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 더. “너는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무례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그 안에 온 우주를 가둘 수 있는,
그러나 우주도 결국 하나의 집이다
집 우(宇) 집 주(宙), 넓을 홍(洪) 거칠 황(荒)…… 평수가 좀더 될 뿐
우리가 또 여기서 어디로 갈 수 있겠어? 가도 가도 여기 이곳뿐인데
그래서 지금보다는 훨씬 큰 집이 필요하다
그건 크기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한순간의 진동일 수도 있고 물에서 빠져나와 들이쉬는 단 한 번의 숨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 안에 모든 발광과 기쁨과 통곡과 신경쇠약을 가둘 수 있는
눈물과 눈물 없인 못 들어줄 그 모든 노래를 넘나들 수 있고 여기서 저-기로
저-기서 여기로 마음껏 건너뛰며 놀 수 있는,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필요하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흉곽 안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풍선처럼 터지지 않는 심장이 필요하고
그 안에 모든 핏물과 파도치는 피바다를 견뎌낼 수 있을 장대하고 긴 핏줄과
충만한 힘이 마음놓고 뻗어나갈 수 있을 드넓은 아량과 이해와 그 모든 넘쳐나는 것들의 온갖 표면장력을 잡아 가둘 수 있을 단
한 채의 집이
손에 집히는 걸 모두 집어던지는 대신
눈에 보이는 걸 모두 자판으로 두들겨 화면 속에 때려박아버렸는데
세상에, 글자들이 담긴 여백이, 그 글자들보다 더
그럴듯해 보이는 거 있지!
아무래도 좀더 큰 집이 필요하다
네 모든 무지와 나태와 방종을 가둘 수 있는, 그것들 모두를 가둬 굶겨 죽일 수 있는
아무래도 하나의 극단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춤으로 바다를 건너낼 수 있다고 해놓고선
바닷속으로 풍덩
물속에 들어가는 칼처럼
깨끗하게 입수하는 춤들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다
바다 끝까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처럼
축 늘어진 팔다리처럼
나는 그 팔다리를 다 주물러주고 싶었으나
누구는 그 팔다리를 몽땅 다 잘라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이상 흔들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물처럼 바람에 출렁이지 않도록
다 잘린 너를 식물처럼 땅에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흐르러지게 붉은 꽃 필 것인가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진 산다화 같을 것인가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눈에서 딱정벌레가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무당들이 시퍼런 칼을 먹고 밤새도록 긴 물 뿜어내는 밤
지평선에 가까워져 바닥에 펴쳐지는 몸뚱아리처럼
오늘은 길어지는 밤이 끝도 없고
너는 정말이지 환하게 미쳐 있다
아주 멀리서도 다 보일 만큼
***
초자연의 밤-
나는 늘 뭘 잘 모르고 뭘 잘 모르는 내가 그것에 대해 품는 생각은 늘
실제의 그것을 초과한다
초자연의 밤- 초자연적 밤바다
누구도 온전히 수용할 순 없어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쾌와 불쾌 사이를 요리조리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자, 여기 칼이 많이 잠들어 있다 어느 칼을 깨워 베워줄까?
잠든 칼은 깨우기만 해도 춤이다 깨어난 칼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춤이 두 눈 번득인가 물에 칼자국 난다!
칼로 물 베기의 예술을, 이번에 누구에게 보여줄까
칼처럼 고요히 누워 있는 물을 누구에게 먹여줄까? 누구 목에 부어줄까?
칼춤 추는 무당아, 하늘에서 보면 너는 붕붕거리는 한 마리 무당벌레로밖엔 안 보이는구나
아무리 날아봐야 출발지와 도착지가 거기서 거기인 작은 버러지 한 마리로밖에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뭐 눈엔 뭐밖에 안 보인다곤 하지만
그러나 네 손가락 위를 기어가던 무당벌레는 손가락이 끝나면 그 끝에서 양 날개를 펼치곤
붕
날아가버리고
뒤에 남겨진 손가락은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멍
하니 바라만 보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뒤늦게 자판이나 두들긴다
춤으로 바다를 다 건너낼 수 있다고 해놓고선
바닷속으로 풍덩
물속에 들어가는 칼처럼
깨끗하게 입수하는 춤들
오늘은 유난히 밤이 길다
바다 끝까지 가라앉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처럼
축 늘어진 팔다리처럼
나는 그 팔다리를 다 주물러주고 싶었으나
누구는 그 팔다리를 몽땅 다 잘라주고 싶었을 것이다
더이상 흔들리며 걸어다니지 않아도 되도록
물처럼 바람에 출렁이지 않도록
다 잘린 너를 식물처럼 땅에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흐드러지게 붉은 꽃 필 것인가
바다 위에 점덤이 흩어진 산다화 같을 것인가
인간 주제에
그래봤자 겨우 눈에서 딱정벌레가 왔다갔다할 뿐인 주제에!
무당들이 시퍼런 칼을 먹고 밤새도록 긴 물 뿜어내는 밤
지평선에 가까워져 바닥에 펼쳐지는 몸뚱아리처럼
오늘은 길어지는 밤이 끝도 없고
너는 정말이지 환하게 미쳐 있다
아주 멀리서도 다 보일 만큼
***
가까스로 화장실로 몸을 던져 지퍼를 여는 데 간신히 성공한 나는
놀란다! 아직도 내 몸안에 이렇게나 많은 따뜻한 것들 숨어 있었다니
술이 확 깬다, 알 수 없는 힘 솟구친다!
그러고는 미소지은 채 그 자리에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하늘이 땅에 물을 주면 땅은 그걸 또 좋다고 다 받아 마신다
술 처먹고 노상 방뇨하는 아저씨들의 물조차도 땅은 다 받아 마셔
만취 상태에 드니 대지가 울렁울렁
대지도 토하고 싶은 거겠지 대기도 흔들린다
때로는 대기도 확 다 토해내고 싶은 거겠지
술에 꼴아 더이상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분이시여
차도를 인도처럼 걸어다니며 온갖 차들로 하여금 너님을 비켜가게 하는 분이시여!
다 토해내고 난 후의 밤이 좋다
“세상을 다리니 그 위에 집을 짓지 말라” 따위의 문장들을 강물 위에 잔뜩 띄워놓고는 그곳을 홀연히 뜨자마자 하나둘 강물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단어들이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한 밤
우울함이 다리 위에서 다리 아래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는
못 본 체 그냥 지나가준다
모든 것은 지나가
이번만은 나도 널 그냥 지나가주지
수십 번 돌려봐도 내 것이 되지 않던 필름처럼 삶이 내 것이 되지 않을 때
그날 봤던 강변의 대관람차를 떠올리며 생각한다, 아무렴 삶이 내 것은 아니지
돌고 도는 삶 위에 올라타 돌고 돌고 돌다 미처 내릴 생각을 못하고
그 아래 펼쳐지는 야경에 탄성이나 내뱉다, 말한다
그러니가 그건, 네 것도 아니다
갈 데까지 갔다, 라는 말이 있던데 갈 데는 무궁하고
겨우 제자리를 돌고 돈 주제에 갈 데까지 갔다, 라고 생각하는 바보 멍청이들이여
삶을 좀 우습게 봐줄 줄 알아야 삶도 널 우습게 보지 않겠어?
별짓 다해봐야 한갓 인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도한 오류와 확대 해석을 통해서만 간신히 신성(神性)에 도달하는 오늘은 정말이지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당하다 내가 죽을, 죽어도 여한 없을 사랑이……
(그럼 신성으로서도 영광이겠지)
나 대신 여기서 더 멋지게 마지막을 장식해줄
지구 최고의 다이빙 선수가 필요하다!
……어머 나 좀 취했나봐,
(오죽하면 네가 그럴까)
그날따라 우린 세상에서 우리가 못할 건 없을 것만 같았고
차라리 모든 걸 잃고 싶다 모든 걸 잃고 나면 사람은 바뀌기 싫어도 바뀌고
정신이 송두리째 뿌리 뽑혀 생각지도 못한 생각에도 이르게 되고
인생을 포기하자 갑자기 멋있어진 한 인간에게 어느 날 너는
한눈에 반하고
그런 밤이면 좀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여백이 필요하다
글자를 읽다 잠시 여백으로 새어나가 마냥 걷다보면 누구도 방해하는 이 없어,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을 만큼의 고요 속에서
끝도 없이 홀로 거닐다 마침내 조용히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네가 내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게
내가 네 혈관 속에 흐를 수 있게 해줄래?
(오죽하면 내가 이럴까)
그런다고 죽는 일은 없겠지만
목숨을 다해서, 라는 기분으로
그래봤자 우리가 어제의 인간에서 한 치라도 벗어날 가능성 따윈, 아무래도 없다고 봐야겠지만
마침내 난 내 모든 걸 다 바쳤다! 라는 기분이 들 때쯤
원하든 원치 않든 다시 잔뜩 들어찬 글자들로 붐비는 아침은 올 것이고
너는 이윽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어쨌거나 오늘은
너의 엄청난 힘이 내 위에서 쓰러지는 게 나는 좋다
_ 황유원, “초현실적 3D 프린팅”, <너의 아름다음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 2017.
[시인의 말] “존재는 소음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내 앞에는 두 가지 시의 길이 주어져 있다.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증폭시켜보는 길과 존재의 소음을 최대한 잠재워보는 길. 나는 이 두 길 모두를 가보기로 한다.”
시 부문 한 심사위원은 “현실에 날카로운 인식이 부족한데, 그걸 시로 만들려고 하니까 언어가 현실과 멀어진 경향이 있다. 지향점을 찾지 못하는 지금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1. 오늘의 혁명 이데올로기는 내일의 반동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걸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다.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권력이 주어지는 능력주의는 지위와 권력을 세습하는 귀족주의와 비교할 때에 혁명적으로 진보적인 이데올로기였다. 능력주의라는 말은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인 마이클 영이 1958년에 출간한 <능력주의의 부상>이라는 책에서 귀족주의의 반대말로 만들어낸 것이지만 … 영이 이 용어를 선보인 1958년경엔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해 사실상 반동 이데올로기로 전락하던 시점이었다. 영은 당시 우경화하려는 노동당 정부에 경고하기 위한 풍자로 그 책을 썼지만, 영의 뜻과는 다르게 읽히면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노동당을 이끌고 1997년 총선에서 크게 이기며 영국 보수당의 18년간의 집권을 끝낸 토니 블레어는 “엘리트가 영국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영국은 능력주의가 지배한다”고 선언했다. 영의 책은 특히 미국에서 큰 주목을 받으면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인들은 능력주의를 대학교육은 물론 아메리칸드림의 이론적 기반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미국에선 능력주의가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차별의 피해자를 게으른 사람으로 비난할 수 있는 논거로 이용되었다.
2. 한국은 미국 못지않게 능력주의를 예찬해온 나라인데, 이른바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압축성장의 동력은 바로 능력주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슬로건이 전 국민의 가훈으로 받아들여진 가운데 능력이 오직 학력·학벌이라는 단일 기준으로 평가되면서 전 국민이 뜨거운 교육열을 보여오지 않았던가. 한국의 발전이 과연 그런 교육열 덕분이었는가에 대해선 이견이 있긴 하지만, 자녀 교육에 목숨을 건 한국인들의 삶의 방식이 발전에 친화적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고성장의 시대가 끝나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종언을 고하기 시작했고, 개천에서 난 용들의 기득권 집단화가 공고해지면서 학력·학벌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가족의 능력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능력주의는 변형된 세습적 귀족주의로 되돌아가고 말았지만, 반동으로 전락한 능력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혁명 이데올로기는 아직 그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3.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과도한 임금 격차는 정의롭지 못하다. 정규직 노동자도 이 총론엔 공감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 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시도가 자신의 조직에서 이루어질 경우엔 반발한다. 그들의 반발은 ‘공정’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정규직이 되기 위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기울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런 능력을 보이지 못한 사람들이 정규직이 된다거나 자신의 임금을 희생으로 해서 임금을 더 받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논리다. 그런 반발을 집단 이기주의로 비난할 수 있을까? 문제의 핵심은 잘못된 게임의 법칙인데, 그 게임의 법칙에 충실했던 사람에게 갑자기 정의의 이름으로 다른 게임의 법칙을 제시하면서 수용하라고 하면 납득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중략) 불평등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법적 질서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가 부동산 투기나 투자로 번 돈을 불로소득으로 간주해 많은 세금을 물리는 법을 제대로 만들어 시행했다면 현 불평등 양극화의 양상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개천에서 난 용’에 환호하며 내 자식도 그렇게 키워보겠다고 허리끈을 조여 맸던 과거의 꿈에 이제는 작별을 고하면서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꿈을 키워갈 때다.
_ 강준만, “능력주의의 파탄”, 한겨레, 2017. 12. 17.
김나지움(고교) 시절에 어떻게 생활했나요?
- “저는 고대(古代) 언어를 공부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김나지움을 졸업했습니다. 영어와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도 배웠습니다.”
고교 시절에 행복했나요?
- “정말 즐겁게 보냈습니다. 학교의 빅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했고 가끔 오케스트라에 클라리넷을 연주했습니다. 자유 시간이 많아서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제 관심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나지움 시절엔 보통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연애도 처음 시도해 봅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성격을 형성하는 시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숱한 연애로 유명한 조르주 상드의 말처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순위는 첫째 아이들, 둘째 일, 다음이 사랑입니다.”(문정희)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
해리(解離).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씨는 대학 졸업 후 홍보대행사에서 일하다가 31세에 대학 선배와 연애결혼을 한 후 딸 하나를 낳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이다. 그런데 그녀가 2015년 가을 어느 날부터 이상증세를 보인다. 왜 그녀는 남편을 ‘정서방’이라고 부르고, 시부모님 앞에서 친정어머니에 빙의된 현상을 보인 것일까? 그 원인을 정신과 의사와 함께 환자인 김지영씨 회고담을 통해 탐사해내는 추적 과정을 보여주는 목차도 르포문학 보고서처럼 연대순이다. ‘2015년 가을 / 1982년~1994년 / 1995년~2000년 … 2016년’에 이르기까지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30여 년에 걸친 그녀의 인생여정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20. [홍성욱] 자연의 법칙이라는 개념의 등장과 부상을 분석한 사람이 에드가 질셀(Edgar Zilsel)이라는 사회학자였습니다. 에드가 질셀에 따르면 유럽에서는 유대교, 기독교 전통에서 ‘입법자로서의 신(God as a lawgiver)’이라는 개념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즉, ‘법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려보낸 신’이라는 개념이 있었는데, 여기서 신이 만든 법은 인간이 지키는 법이지, 자연에서의 죽은 생명체, 돌이나 지구와 같은 자연물이 지키는 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입법자로서의 신이라는 개념이 확대되고 또 16~17세기에 전제군주제가 확립되면서, 나라 전체에 통용되는 유일한 법이라는 개념과 결합해 자연에도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최초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24~25. [홍성욱] 멘델의 법칙은, 형질이 다른 완두콩이 2대에서 3:1의 비율로 나타난다고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거나 관찰을 해보면 절대로 3:1로 나타나지 않아요. 2.8:1이라든지, 3.1:1, 3.2:1까지도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멘델의 법칙을 3:1이라고 알고 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보편적이고 단순한 멘델의 법칙이 자연에 존재하지만 복잡한 자연 현상은 이 법칙의 예외에 해당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복잡한 생명체가 매우 다양한 유전의 양상을 보이는데, 멘델의 법칙은 이런 복잡한 유전현상의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법칙일까요? 저는 후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과학자들이 법칙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복잡한 자연 현상에서 아주 추상화되고 이상화된 요소를 뽑아내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만들었을 때,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창조해 냈을 때, 우리가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온다는 것이지, 자연에 그 법칙이 실재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마치 돌을 줍듯 자연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7. [이강영] 사실은 정말로 존재하는 자연법칙이 단순히 뭔가에 비례하도록 되어있을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거나, 실험실에서 관찰할 때는 특정한 조건일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온도는 주로 상온에서라든가, 실험실에서 전기장이나 자기장을 걸어줄 때는 실험 가능한 정도의 크기로 실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 법칙이, 정말로 그 안에 들어 있는 법칙은 굉장히 복잡한 함수라 할지라도 우리는 제한된 범위에서 일부만을 관찰하게 되고, 많은 경우 우리가 얻은 데이터는 근사적 직선으로 표현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가 ~에 비례한다’는 식으로 법칙을 만들게 됩니다.
30. [이강영] 스티븐 와인버그는 “나와 법칙의 관계는 나와 의자와의 관계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 의자에 앉아 계시죠? 의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알죠? 이렇게 바꿔 말해보겠습니다. 의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어떻게 될까요? 뒤로 넘어지게 될 겁니다. 그러면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그 법칙에 의해서 우리가 예언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될 겁니다. 우리는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법칙에 따라서 우리가 그 현상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곧바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을 때 거기에 대해서 얼마나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이 존재한다고 할 때와 똑같은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똑같은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물리법칙이 자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31~32. [홍성욱] 자연에서 우리가 쇠공과 깃털을 떨어뜨렸을 때 같이 떨어지나요? 안 그렇습니다. 자연에서는 쇠공이 빨리 떨어집니다. 자연이라는 것이 재정의 됐다는 거죠. 갈릴레오에 의해서요.갈릴레오의 법칙을 만족하는 것이 자연이라고, 과학자들이 17세기부터 다시 정의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수학적인 공간을 진짜 자연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게 물리학이다, 그게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학문이라고 말이죠.
33. [홍성욱] 의자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의자가 없으면 제가 앉아있지 못해요. 넘어지죠. 근데 법칙이 없다고 자연이 붕괴되느냐? (중략) 뉴턴의 법칙이 있기 전에 태양계가 붕괴됐을까요? 아니죠. 자연은 존재합니다. 자연은 존재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인간에게 이해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게 과학의 역할이죠.
44. [홍성욱] 뉴턴의 중력은 많은 경우에 존재한다고 믿어왔고 우리도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배우지만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현상(epiphenomenon)’이라고 부르죠. 그러니까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휘어진 시공간에서 물체가 운동할 때, 두 물체 사이의 어떤 관계를 우리가 중력이라고 부른다는 식으로 일반 상대성이론에서는 실재성이 많이 희석됐습니다.”
46. [홍성욱] 자연은 원래 복잡해서 딱 3:1로 떨어지는 경우는 없는데 그것을 우리는 3:1이 나온다고 이해하자, 그것을 우리가 법칙이라고 부르자는 거죠. 멘델이 그것을 발견하고 만들어낸 것이죠. 그 복잡한 자연 현상에서 간단한 패턴, 간단한 수학적 관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적인 과학자인 것이고요.
_ 홍성욱 외, <과학은 논쟁이다>, 반니, 2017.